고기 없는 주간

2010.11.14 18:04 Tags » , , ,

연필을 찾다가 서랍을 열었는데 다홍색 종이박스가 눈에 띄었다. 거의 8년 간 나와 함께 떠돌고 있는 한뼘 반 크기의 조그만 종이 박스. 이번에야말로 한 번 뜯어서 펜을 써볼까 하고 박스를 열었다가 또 다시 하나씩 꺼내서 망설이며 만져보기만 하고 다시 넣으려는 찰나 펜 케이스 아래 부분에 넣어둔 편지가 묘하게 거슬린다. 쓰지도 않을 펜 세트를 8년이나 여기저기 다닐 때마다 들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이건 또 뭐야. 이런 게 왜 여기서 나와. 차마 다시 꺼내 읽어보지도 못할 편지들은 왜 여기다 넣어 놓았는지. 게다가 무슨 생각으로 하필 이 박스에 넣어서 여기까지 가져온걸까. 어떤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다만 다시 열어 읽어볼 마음도 대처 나지 않고, 봉투를 보는 것만으로도 신산해져 대강 재킷에 머플러만 두르고 3일만에 외출을 감행했다. 아니, 4일인가. 수요일 시위하러 나갔다가 돌아온 이후로 한 번도 기숙사 밖을 나서지 않았으니 4일. 그새 바람이 한결 서늘해진데다 온도도 한참 낮아졌다. 비오는 길을 정처없이 걷다가 장이나 봐야지 싶어 테스코에 들어갔는데 딱히 살만한 게 없다. 한동안 장도 안본 터라 저장기간이 상대적으로 긴 근채류 따위나 먹으며 지냈는데 간만에 고기를 봐도 전혀 식욕이 동하지 않고. 생선도 별로고, 심지어 술도 안끌린다. 결국 배추 하나, 샐러드용 잎채소 한묶음, 귤이랑 치즈, 신문 한 부만 사서 돌아오며 곰곰 생각해보니 고기를 먹으면 이 무기력증에서 탈출할 수 있는걸까 싶어지네. 설마, 그럴리가. 핑계겠지. 이건, 리딩위크 마지막 날이라 생긴 학교가기싫어병일걸. 그럼 처방전은? 그런 게 따로 있을리가. 그냥, 밤이 되면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가면 되는 거.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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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dr-chung 2010.11.15 00:16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고기를 봐도 식욕이 동하지 않는다니!!!
    4일만의 외출이라니!!!!
    그 펜 세트엔 무슨 사연이 있는거??

    맛있고 좋은 육류를 섭취하는건, 인생의 큰 즐거움을 주는 일이니, 곧 시행해보도록 하여요~

    • BlogIcon Munity 2010.12.05 15:31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그 펜 세트는..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가 준 것.
      고기는 4일 뒤 두터운 써로인 스테이크로 해소.
      역시 고기총량의 법칙이 있더라니까.

  2. 2010.12.17 11:5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