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랄까

2010. 2. 19. 21:43 Tags »


일주일이 참 길고도 길었다.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오늘도 굳이 캠브릿지 대학교까지 가서 Security, Terrorism and Risk에 관한 다윈 시리즈 강의를 듣고 레이디 미첼 홀을 나서는데 비처럼 쏟아지던 가벼운 눈발이 점점 거세어지고.. 결국은 눈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잠깐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뭔가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그러나 별로 요리를 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다. 언제는 그랬냐만은. 결국 다 관두고 캔맥주를 땄다. Greene King IPA. 캠브릿지 특산품. 기네스보단 조금 덜 씁쓸하고 가벼운 에일. 조금 더 구수하달까. 기네쓰 맛이 세다는 사람들 의견에 한번도 공감한 적 없는데 Greene King IPA에 맛을 들여보니 무슨 얘긴지 알겠다. 난 뭐 어느 쪽이든 괜찮아. 그래서 요즘은 기네쓰와 그린킹 중에 promotion sale 중인 걸 산다. 역시 라거는 별로.

아무튼 맥주를 따고 보니 너무 조용한 방이 거슬려서 BBC IPLAY 홈피를 뒤적이다 밴쿠버 올림픽 하이라이트를 보기 시작했다. 닥터 후 시즌 3 컨피덴샬 프로그램도 있었고, 왜 사람들이 뱀파이어에 매혹되는지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있었지만 그냥, 정말 아무 생각 없이 14일 프로그램을 클릭. 올림픽 초반이라 기간 내 메달권이 예상되는 영국 선수들의 짧은 인터뷰가 초반에 있었고, 여자 모굴 경기도 손에 땀을 쥐고 맥주를 홀짝여가며 다 보고 나니(이유는 나도 몰라) 쇼트 트랙. 뭔가 유명한 선수 출신이었다던 영국인 해설자는 이번에야말로 웬지 한국의 독주가 끝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단다. 미국의 안톤 오노가 인생 최고의 쉐이프를 갖고 있대나. 영국인 선수 둘이 출전했던 여자 500m 예선이 끝나고 남자 1500m 예선이 시작되었다. 물론 나는 결과가 어떻게 끝났는지 안다. 그치만, 아무렴 어때. 오늘은 금요일 밤이고, 나는 밑도 끝도 없는 테러리즘과 위기 관리에 관한 강의를 들은 후 이 눈 오는 밤에 홀딱 젖은 채 돌아와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맥주를 두 캔째 마시며 올림픽 하이라이트를 보는 중이다. 뭘 보든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크게 관계가 없단 말이지.

그래도 사실대로 말하자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는 결선보단 예선이 조금 더 볼만 했다. 특히 예선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전부 휙 제끼고 저만치 앞서가던 이호석에게 감탄. 영국 해설자들도 감탄하더라. 다른 선수들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고. 결선 결과가 그렇게 되어서 참 유감이다. 뭐랄까, 다른 선수들과의 경쟁보다는 본인의 스피드와 에너지를 관리하는데 집중한 것 같았던 예선과는 너무 다른 결과가 나왔다는데 특히. 본인도 많이 안타깝겠지. 코리아의 리. 아, 그러고보니 올림픽 해설자 중 누구도 그 코리아가 사우스 코리아인지 노스 코리아인지 개의치 않는다. 그냥 코리아. 솔직히 말하자면 이곳에서 사우스 코리아건 노스 코리아건 제대로 아이덴티티를 부여받는 건 핵무기 관련 뉴스가 등장할 때 뿐이다. 나머지는 그냥 잘 모르는 코리아. 가끔, 팍(지송 팍)의 코리아. 밴쿠버 하이라이트에선 쇼트트랙의 코리아.
 
눈은 그쳤다. 건너편 건물에선 오늘도 한참 파티 중이고, 영국의 겨울 밤은 길고도 길건만 내게 남아있는 그린킹은 한 캔. 막 아홉 시 사십 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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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21 16:4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그린 킹 IPA라고 하시니 국제음성기호(IPA)가 생각나서 참 음미ㅎ하게 되는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