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

2008. 4. 21. 03:56 Tags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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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잠에서 깰 땐 순식간에 급격히 움직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전화를 받겠다고 벌떡 일어나서 침대에서 내려오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방바닥에 나동그라지는 경험을 두어 번 하고 나니 이젠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거다. 몸으로 배운 거지.

그래서 요즘은 자다가 깨서 눈을 뜨면 5분 정도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동생 표현을 빌자면) 멍을 때린다. 그 순간엔 별별가지 잡다한 생각이 다 스쳐간다. 오늘 하루 계획부터 어제 마무리 못한 일, 두 달 전의 불쾌한 만남, 며칠 전에 들었던 음악, 이번 주에 구입해야 하는 물건 목록, 일주일 전의 전화 통화, 등등.

오늘 내 뒷머리를 잡고 늘어진 건 내 연락을 받지 않는-부름에 응하지 않는 한 친구에 관한 생각이었다. 그 친구가 내 전화를 받았던 건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응답없는 문자와 이메일. 그쪽도 나도 원래 그렇게 부지런한 관계를 맺는 타입이 아니었고 실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며 지내는 편이긴 하지만 문득 생각해보면 내게 그 친구로부터의 소식은 언제나 희소식이었다. 언제나 기뻤고, 언제나 반가웠지. 그와 드문드문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그 대화는 사소한 기억의 지층을 흔들어댔다. 우리가 쌓아올렸던 슬프고 기쁘고 행복하고 불행했던 기억과 그 시간들. 그 친구는 내게 그 무렵의 꼬리표같은 거였나보다. 내가 당시 무얼했건 그건 어떤 방식으로든 거의 모두 그 쪽을 향해 얽혀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게 성향 탓이라고 치고, 연락이 닿지 않아도, 응답이 오지 않아도 잘 지낼 거라고 믿었다. 내가 필요해지면 날 찾겠지. 그 친구에게도 어느 순간엔 내게만 할 수 있을 얘기가 생길 테니까, 라는 식으로.

얼마 전에, 아마도 한 3주일 전에. 생각이 났다. 잘 지내나? 봄이잖아. 이 즈음엔 같이 소풍을 가곤 했는데. 간만에 만나는 건 어떨까 싶어 곧 전화를 걸었다. 그의 전화번호는 나와 알고 지낸 이후로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으나, 이 시점에 이 글을 읽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내가 누른 그 번호엔 이미 주인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을 때 예상할 수 있는 소식치곤 꽤 가혹하지 않은가.  

잠시간 어쩔 줄 모르고 전화기를 보고 있다가 그 소식이 시사하는 바가 몇 가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첫째, 전화번호가 바뀌었고, 나는 그 전화번호가 언제 바뀌었는지 모른다. 작년 겨울이 막 시작되던 무렵 연락을 했었으나 그땐 답을 받지 못했으니 아마도 그 이후일 것이다. 둘째, 전화번호를 바꾸고 지인들에게 바뀐 번호를 알릴 때 나는 그 지인의 목록에 끼어있지 않았다. 셋째, 제작년 이래 그는 한번도 내게 먼저 연락한 적이 없었다. 아마도 마지막 이유 때문에 나는 그의 연락처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나는 최근 그가 어디서 뭘 하며 지내는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지 못한다. 내가 짐작만 하던 그의 안부는 온전히 내 기대에만 부응했을테고 그건 실제 그의 생활이나 그의 바램과는 전혀 상관없는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아직까지도 잡고 있다고 믿었던 손은 그의 손이 아니라 희미하고 연약한 '관계'의 유령의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그러므로 이것은 4월의 봄, 어느 화창한 아침에 떠올릴 수 있는 생각치곤 제법 칙칙하기 짝이 없는, 그런 이별의 이야기.


(사진은 i4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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