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물을 마시는 꿈을 꿨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꿀꺽꿀꺽 넘어가는데 아무리 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이 가시질 않는 거다. 그래서 또 꿀꺽 꿀꺽. 아침 일찍 잠이 깨서 정말 목이 마른가 싶어 물을 마셔봤는데 실제로 목이 말라서 그런 꿈을 꾼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혹은 밤새 내가 찾던 게 물이 아니었던지도.
아침식사를 하고 방에 돌아왔는데 불현듯 방 꼬락서니가 더는 돌려막기로 어찌해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정리를 시작했다. 제일 급한 게 책장이라(책이 한권이라도 더 늘어나면 이젠 바닥에 쌓아야 할 정도로, 더 이상 어찌해볼 수 없는) 책 정리부터 하기로 했다.
책이 많지는 않은데 관심사가 워낙 중구난방인데다 딱히 뭐랄 수 있는 기준점이 없어 책장 정리를 할때면 분류를 어찌할까 하는 문제로 곤란을 겪는 일이 많다. 그래서 예전엔 사회과학-인문과학-순수문학-장르문학으로 큰 분류를 놓고 하위 분류를 작가/국가로 정리하기도 했는데 이번에 중요한 건 공간을 확보하는 거라 책의 크기와 두께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했다. 결국 이 책이 어디 있을까 했을 때 예측 가능한 위치에 놓는 걸 목표로 두고 책을 꼽기 시작했다. 책의 위치가 예측 가능해야 하고, 두께와 크기를 잘 맞춰서 가능한 한 많은 공간을 창출하는 것. 다행히 책장이 깊어 책을 이중으로 꽂을 수 있었고, 그래도 모자라 중간중간 쌓아야 했지만 장장 7시간에 걸친 작업 끝에 정리를 마쳤다. 끝내놓고 보니 버리려고 내놓은 종이며 책들이 한아름씩 다섯 묶음이나 된다.
몸은 힘들어도 책 정리는 즐거운 종류의 일에 속한다. 모든 책들은 그마다의 역사가 있으니까, 책을 집어들 때마다 조그마한 기억들이 함께 묻어들기 마련이다. 책과 사람과 장소와 시간의 기억들.
책장 정리를 마치고 화장대로 갔다. 이쪽은 그래도 가끔 정리를 해줬던 터라 손이 많이 갈 일은 없지만 오늘은 맘먹은 김에 유통기한이 30개월 이상 지난 화장품들도 다 버리기로 하고 일을 시작했다. 정리하다 보니 새상에, 대학 입학하고 처음 선물 받았던 립스틱도 고스란히 새거인 양 남아있다. 화장대에서만 버릴 물건들이 10리터 쓰레기봉지 가득 나왔다. 작정하고 버리지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십년도 더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을 사소하고 잡다한 물건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책상이다. 책상과, 책상에 딸린 책장. 책상은 어쩜 치워도 치워도 매일 엉망이고, 맘먹고 크게 치워도 어디선가 이상하게 5년쯤, 10년쯤 된 물건-종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선물받고 한번씩 열어보며 말끄러미 웃다가 다시 넣어두곤 했던 로트링 펜 세트라든지, 7년 전 받은 크리스마스 카드, 2004년 겨울 그애가 3년만에 내게 보냈던 편지, 아,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5년 전 내가 쓰고 보내지 않은 편지였다. 브리스톨에 있을 때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겠다고 써놓은 모양인데 어째 여즉 나한테 있는걸까 모르겠다. 어때요, 이거 줄까요, 겨울의 조각 작가님?
그래서.. 12시간의 고된 노동 끝에 내 방은 이제 다시 어질러질 준비를 마쳤다. 마음은 소소하게 뿌듯하나 몸은 여기저기 쑤시지 않는 곳이 없다. 부디 호되게 고생한 허리와 팔이 회복될 때까지만이라도 내 방이 이만큼의 평온과 안정을 유지해주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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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를수록 버리는 게 조금씩 쉬워진다고 느끼곤 해요. 남기는 거 보다 버리는 게 더 많아지는 경향도 있고. 그 모든 미련은 다 어디로 갔나 몰라요.
겨울의 조각 작가님 ^^
작가님 답이 없으시다는.. (본인을 지칭하는지 모르는 걸지도)
아악... 양심이 콕콕 따갑다아..
양심 운운하자면 난 너무 오랜시간 양심을 어디다 팔아먹고 산 거..
하나하나 오년 십년 모으는 것도 재밌지만, 한 십년간 모은 물건을 냅다 내다버리는 것도 쾌감이.. 그래서 난 둘 다 좋아해요.
오래 간직할수록 중요도가 높아지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그게 별 의미 없어지기도 하니까요.
작가님 왈, 대체 뭘 정리한거냐.
이로써 5년 전 작가님께 갔어야 할 편지는 화로 속으로.
화로도 있구나.
편지는 화로에 태우는 거잖아요. 아직 화로구이를 못먹으러 가서 남아 있긴 해요. 그러나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