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2008.06.03 03:47 Tags » , , , , ,


꿈을 잘 꾸는 편은 아니지만 종종 꿈을 꾸고 잠이 깬 뒤 드물게 그 꿈을 기억까지 할 때, 혹은 세세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도 꿈의 잔상이 흐릿하게 남아 있을 때 으레 떠올리는 노래가 있다. '난 누굴 찾고 있는지, 여기는 또 어딘지, 터무니 없는 풍경에 익숙해갈 쯤에 갑자기 깨달았지. 네가 옆에 없는걸, 괜찮아, 걱정없어, 이건 아마도 꿈일테니까. 용기를 내'

윤상 <악몽>, Insensible 수록

그러나 오늘 나를 터무니없는 악몽에서 구원한 건 박효신이었다. 얼굴을 알 수 없는 반 친구의 입을 빌어 흘러나오던 박효신의 느릿하게 흐느적대는 노랫소리. 물론 그 친구가 기대고 선 칠판이 보여준 뮤직비디오의 초현실감 덕분에 불현듯 현실로 돌아왔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여튼 심각하게 고민과 걱정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날 건져낸 건 그의 목소리였음이 분명하다. 무슨 노래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게 유감일 뿐.

당장 내일로 다가온 중간고사, 과목은 영어와 도덕. 윤리도 아니고 도덕이다. 거기다 덤으로 얹힌 체육 필기시험. 그래, 중간-기말고사 시험 편성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국영수사과 주요 과목에 가벼운 암기과목을 하나 얹어주는 식의. 아무리 가볍다곤 해도 외어야 하는 거라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데 가볍다고만 생각해서 제대로 시간을 안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겨우 몇 시간 벼락치기로 교과서와 노트만 읽어보고 포인트가 되는 키워드를 외어서 주관식에 대비하는 게 대부분이었지. 가끔 교과서를 전부 읽기 싫으면 문제집을 풀고, 맞추지 못하는 것만 찾아서 읽기도 했다. 맥락도 없이 단편적으로 끼워 맞춰 보는 공부. 그러니까 여기서 포인트는 벼락치기다. 무슨 시험을 봐도, 뭘 해도 벼락치기하는 기분. 그러고 보면 난 수능을 볼 때도 벼락치기를 하는 기분이었어. 맙소사.

생각해 보면 내일이 시험이라는 사실을 오후 다섯 시가 되어서야 깨달은 적은 없었다. 째깍째깍 아무것도 아랑곳없이 무정하게 돌고 도는 시계바늘을 맘속에 하나 달고 어쩐지 속수무책인 양 발을 동동 구르기야 했지만 언제나 달력과 시간표를 머릿속에 넣어둔 채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점점 짙어지는 불안에 휩싸여 있었지. 내 벼락치기란 줄곧 그랬다.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 그래서 그 마지막 순간의 심장박동을 결국 듣고야 마는.  내가 미루고 외면했던 모든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 모두 함께 한꺼번에 밀려들고야 말거라고, 가장 나쁘고 끔찍한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면서, 그러고 나면 그 다음엔? 괜찮아, 걱정없어, 네가 곁에 없으니 이건 아마도 꿈일 거라고 중얼대며 자조할 수 있을까. 그게 그저 악몽일 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난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닌걸.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박효신 노래는 <편지>다. 보컬과 썩 잘 어울린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가벼운 숨결로 전하는 다정한 안부인사에 웃어주지 않기는 힘든 노릇이다. 그러나 오늘 떠올린 건 <편지>가 아니라 김동률이 작곡한 <동경>. mp3에 앨범 표지 이미지 태그를 붙이듯 노래에 이미지를 붙인다면 이 노래엔 스트레칭 장면이 붙을 거다. 한 겨울 재즈댄스 강습시간, 뻣뻣한 몸을 굳이 이래 저래 펴던 그 시간, 박효신은 이렇게 노래하며 울먹였고 맘껏 움직여주지 않던 내 팔다리도 박자에 맞춰 소리없이 비명을 질러댔던 그 시간의 이미지.
 

박효신, <동경> Second Story 수록



'보고들은것 > 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빗방울보  (1) 2009.10.09
윤상 6th, 그땐 몰랐던 일들  (2) 2009.07.07
낯선 사람  (0) 2008.08.26
시간이 약이 된다고  (4) 2008.07.20
아테네 올림픽  (2) 2008.06.09
악몽  (3) 2008.06.03
  1. BlogIcon hey 2008.06.03 04:3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