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인의 삶

2008. 4. 28. 05:20 Tags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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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드라이만은 더 이상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 그는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 없는 감옥에 감금되지도 않았고 어떤 제재도 받지 않았지만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이야기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 드라이만을 핍박하고 싶어 안달하던 전 문화부 장관은 그 이유를 반항할 것도, 혁명으로 무엇을 바꿀 필요도 없는 완벽한 체제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꼭 그렇지는 않았다. 좋은 일 보다 나쁜 일이 사람을 좀 더 자극하는 것은 맞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건 꼭 그런 식의 자극만은 아니니까. 어떤 사람은 상실감에서 움직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갈구하는 애정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그리고 비즐러를 움직인 건 진실이었다. 진실로 완벽하게 '실재'로 존재하는 2인 국가에 대한 동경(*태초의 밤-커트 보네거트).

드라이만과 질란드가 삶을 꾸려나가던 작은 공간은 처음엔 그 둘만으로도 완벽했으나 비즐러가 그들을 지켜보기 시작하면서 그 무대는  더 이상 둘만으로는 완벽하지 않다. 일단 끼어든 이상 뭐든 역할을 해야 하므로 결국 비즐러는 관객과 연출자의 자리를 넘나들기 시작한다. 드라이만과 질란드와의 인터랙션이 깊어질수록 비즐러 개인의 삶의 파고 역시 높아진다. 그는 창녀에게 머물러달라 부탁하고, 그의 정체성을 묻는 아이에게 공의 이름이 무엇이냐 묻는다.

그래서 비즐러가 왜 갑자기 변했느냐는 질문은 이치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저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보일 때, 그 빛을 향해 나아가지 않을 수 있다면, 그래, 그 질문은 옳다. 하지만 누구든 그렇지 않겠는가.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즐러가 바라보는 드라이만과 질란드의 삶은 진실이었으니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방법을 가르치던 비즐러가 불나방처럼 그 진실을 향해 뛰어드는 게 이상할 리가 없다. 실제로 비즐러가 찾던 건 진실이지 체제를 위한 변명은 아니었으니까.

드라이만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깨닫는다. 비극으로 끝난 줄 알았던 그 무대에 함께 올라 있던 다른 배우의 존재를. 그리고 아직도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남아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생이 지속되는 한 아직은 어떤 이야기도 끝나지 않았고 그들이 공유했던 진실은 여전히 빛바래지 않은 채 조용히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었으므로. 아아, 그래서 파블로 네루다도 노래했던 거다. We shall go on living-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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