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복수는 나의 것> 이야기를 꺼내게 되서 민망하긴 한데, 이런 종류의, 화면 가득 뻘건 피를 뿌려대는 영화를 보고 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그 영화니까 어쩔 수 없지. <아저씨>는 <복수는 나의 것>이 그랬던 것처럼, 진저리나는, 가학적 폭력에의 거부감을 부채질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동안 <악마를 보았다>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같은 걸 보면서 그런 화면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래도 근본적인 이유는 <아저씨>에 등장하는 폭력에는 내러티브가 전혀 없기 때문이지 싶은데. 그래서 아무리 잔인해져도, 온몸에 칼을 푹푹 꽂고 손목이나 입을 찢고 눈알이 굴러 다니는 어떤 장면들을 늘어 놓아도 관객의 공포심을 자극할 수 없다. 물론 피는 무조건 싫어요 타입은 제외.
이 영화의 경우 문제는 폭력에만 내러티브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이야기나 캐릭터의 구조도 총체적 난국이라 차라리 피 뿌리는 장면은 눈 뜨고 봐도, 태식이나 소미가 대사를 치기 시작하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싶어진다. 영화를 보던 관객이 빠른 액션과 진행에 잠깐 넋 놓고 그러러니 넘어가는 건 괜찮다 쳐도, 만드는 사람들마저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리면 곤란하잖아. 부러 그랬다면 그건 매우 영리한 트릭이지만 어딜 봐도 그렇게 똑똑한 영화는 아닌지라 도저히 맘편히 보고 있을 수가 없다. 특히 대책도 없이 이미 떠난 차를 죽어라 쫓아 달려가다 놓치는 장면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 걸 보고 있자니 아 이게 바로 이 영화의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란 생각도 들더라니까. 답도 없고 길도 없지만 뛰던 길이니까 일단 뛰고 보자는 난감무쌍한 상황. 그러니 영화가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신파로 끝나는 게지.
+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노파가 라면을 먹는 장면이다. 틀림없이 그건 다 식은 라면이었을 거야. 뜨거운 라면을 그렇게 잔뜩 입에 넣고 후루룩 빠르게 먹을 수 있을 리가 없다니까. 한 마디 덧붙이자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캐릭터도 그 노파다. 금방이라도 입이 새빨갛게 양옆으로 쭉 찢어진 채 뒤돌아 볼 것 같은 홍콩할매귀신의 이미지.
예전의 책 리뷰에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아마도 월플라워), 시대나 세대, 취향과 이슈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문화적 레퍼런스들을 주도적으로 사용하는 건 분명 장단점이 분명한 시도이다. 월플라워는 분명 실패로 끝났고, 반면 500일의 썸머에서 사용한 대량의 꼴라주는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굳이 구분하자면 차용 스타일의 문제. 영화 내에서 뒤죽 박죽 전개되는 시간의 흐름 때문에 이야기들이 종종 거칠게 끊어지거나 이어지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에피소드의 모서리들을둥글게 마모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음악, 책, 영화, 등등이다. 문화적 레퍼런스들이 오히려 허브 역할을 하면서 이야기의 향을 더해 기억하기 쉽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도 장점. 시간이 아무리 뒤섞여있어도 덕분에 덜 헷갈리게 되고. 게다가 500일의 썸머는 레퍼런스를 대량 차용한 영화들이 종종 빠지기 쉬운 '함몰'의 함정을 영리하게도 잘 피해갔다는 점이 더욱 돋보인다.
나머지 스타일은 특기할 만한 게 없다. 오히려 재기발랄하다 여겨지는 어떤 신들은 이상하게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느껴져서 곰곰 생각해보니 예전 이명세 영화들이 떠오르고.
내용에 대해선 별 할 말이 없으나, 마치 봄날은 간다가 그랬던 것처럼 일종의 성장 영화인 양 마무리된 점은 아쉬웠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아무리 달콤했건 끔찍했건, 지나간 사랑/연애로부터 배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라. 톰도 썸머도 말하듯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니까. 톰이 사직을 고하면서 울부짖은 그 대사들은, 모두 맞다. 아무리 비슷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도, 아무리 감정 이입을 해려고 애써봐도 카드의 문구나 영화, 음악 등등에서 내 마음을 그대로 비추는 '정답'을 찾을 순 없는 거. 그걸 지나간 사랑에서 찾을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
아, 마지막 이별의 순간에 행복을 빌어주는 거. 진심일까? 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잘되길 바란다고, 행복을 빌어줄 순 있지. 내가 행복을 빌어준다고 그 사람이 나쁜 놈이 아닐 리 없고, 그 사람이 나쁜 놈이라고 해서 꼭 접시물에 코박고 죽으라는 심정이 되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넌 나쁜 놈이지만, 그래도 잘 살아라 정도로 타협할 수 있을 거라 생각.
500일의 썸머 좋은 영화죠~
전 남자 입장에서 정말 공감 많이 하면서 봤어요.
그러면에서 여기서 조셉 고든 래빗이 조금 찌질하게 나오는데 현실의 저도 그러지 않나 싶은 ;;;;
그런데 뭐 다 비슷하지 않나요 ㅎㅎ
여기서 주이 드 샤넬도 정말 예쁘게 나오고, Carla bruni랑 Regina spektor 같은 유명한 분들 노래가 나오니까 전 보면서 신기하더라구요 ㅋ
내가 <콘스탄트 가드너>를 한동안 그렇게 좋아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결국 어떠한 흠결도 찾기 힘든 형태의 사랑을 갈구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였고, 둘째, 그토록 섬세하게 흐르는 배우들의 표정과 연기를 단 한 순간의 흔들림도 없이 담아냈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완벽한 마지막 대사와 엔딩크레딧의 음악 때문이었다.
레이첼 바이즈의 연기는 꽤 진폭이 크지만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몇몇 장면들을 만들어냈으며, 레이프 파인즈의 연기는 매우 고르고 잘게 다져진 가운데 아주 종종 무거운 한숨을 내쉬지 않고서는 쉽게 넘어갈 수 없을만치 무거운 힘을 과시하곤 한다. 거의 모든 대사와 전체 스토리의 구성이 꽤나 좋은 편인데 반해 이야기 전체를 받치는 미스터리의 구조가 살짝 헐거운 것이 제일 눈에 띄는 단점. 음악은 전반적으로 매우 훌륭하다.
1. <마더>는 배우 김혜자에게 온전히 바쳐진 영화이다. 이건 봉준호 감독이, 배우 김혜자를, 수십년 간 연기자로서 쌓아온 이미지와 캐릭터 뿐 아니라 눈과 코, 입, 손을 비롯한 김혜자의 모든 것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섬세하게 베껴내어 만들어낸 영화라는 의미이다. 감독은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러닝타임 내내, 배우 김혜자를 복제하고 압축하고 과장하고 해체하여 관객 앞에 내놓는다. 온전히, 김혜자만. 그러니까 이 영화의 성공 조건은 과연 (원빈마저도 눈이 사슴 같다는 것 외엔 안중에도 없는) 감독이 배우 김혜자를 경외한 만큼, 관객들도 그러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에 있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살인의 추억>에서 봉준호 감독이 그려냈던 '강간의 왕국'은 <마더>에서 '원조교제의 온상'으로 거듭났다. 댓가는 쌀. 먹고 사는 문제다.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그러나 체홉의 말처럼, 이미 등장한 총은 발사되어야 하니, 돌 역시 던져질 뿐. 헌데 실상 그 돌에 맞아야 했던 건 누구일까. 바보라 그러는 사람들 가만두지 말라고 배운 그 애일까. 공양미 삼백석도 안되는 쌀에 몸을 팔고선 그저 다 지겹고 싫었던 그 애일까. 먹고 사는 문제를 볼모삼아 그 애를 착취한 그들은 밤새 발 뻗고 잘도 자겠건만.
3. 뭐라더라. 다 잊게 해주는 침 자리를 안다고 하시던가. 슬픈 일도 맺힌 일도 아픈 일도 다 잊게 해주는, 그런 침 자리를 아신다던가. 엄마 손은 약손이라 그 침 자리야말로 그저 엄마만이 줄 수 있는 위안일테지만 엄마 없는 종팔이는 어쩌지. 그러니까 봉준호 감독은 역시 빠져나갈 구멍, 그런 희망을 남겨놓는 사람이 아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잊지 못할 것이다. 다 잊고 다 털고 근심없이 꽃밭으로 노닐러 가려거든 그런 침 자리 따위 아무 소용 없지, 좀 더 센 농약 탄 박카스라면 몰라도.
웬만하면 다 호평이길래 기대가 컸다. 영화를 실제로 본 후엔 뭘 보건, 뭘 읽건 기대는 금물인데 내가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 '기대'만 야금야금 쌓아놓지 않았더라면 꽤 즐겁게 봤을지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내 경우엔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 칼로 찌르는 것보다 이로 물어 뜯는 걸 보는 게 정말 무섭다. 이게 단순히 좀비 영화같은 데서 연결되는 '식인'과 관련된 심상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있긴 하지만, 실은 이로 물어 뜯는 거 말고 이를 뽑는 걸 보는 것도 무섭긴 매한가지라(설마 치과 때문에?) 예전에 쏘우 몇 편이던가의 티저 포스터에서 어금니와 관련된 이미지를 보며 제작자가 누군지 몰라도 이 사람 핵심을 좀 안다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뭔가 말이 길어지는데.. 아무튼.
이와 관련된 공포에 감정이입을 강하게 하는 내 경우와 같이 사람들마다 특별히 취약한 특정 "공포 이미지"를 갖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영리하게 이용한 영화가 <드래그 미 투 헬>이다. 그러니까, 공포영화의 클리쉐라고 할 수 있을 어떤 특정 이미지나 장치들을 그대로 갖다 쓰면서도 최대한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연출하고, 그렇게 이거 저거 다 넣어놓고 보면 어떤 관객이든 뭐 하나에는 놀라거나 공포를 느낄 거라고 계산하고 만든 영화가 아닐까 싶다는 것. 그렇게 이런 소재 저런 소재(이, 손톱, 아무도 없는 지하 주차장, 피, 지옥불, 저주, 집시, 무덤, 귀신, 악몽, 악령, 환영, 벌레, 환청, 강박증, 비만, 열등감, 꼴 뵈기 싫은 직장동료, 남녀차별, 폭력, 거짓말, 기타 등등) 다 끌어다 써도 절대 난잡하거나 산만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점이 <드래그 미 투 헬>의 부인할 수 없는 장점 중 하나고, 워낙 얼개가 단순한 스토리에 괜찮은 캐릭터 하나를 집어넣어서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만으로도 그게 가능했다는 것도 (수많은 엉터리 호러 영화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놀랍다.
그러나, 섣부른 기대는 금물. 수많은 연출 상의 장점에도 불구하고(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결국은 "단순한 스토리"에 "괜찮은 캐릭터" 하나가 있는 공포 영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쪽에 방점을 찍고 보느냐에 따라 감상평의 무게가 많이 달라질 수 있는 타입이니까.
그러고 보니 작년에 <월-E>도 봤고 올해 <업>도 보았네. 딱히 픽사 애니메이션에 애정을 갖고 있는 게 아닌데도 어떻게든 한 편씩은 보게 된다는 게 신기하다.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닌데도 말이지.
<월-E> 때도 살짝 그랬지만 티켓을 끊고 상영관에 들어가 앉으며 앞으로 뭐가 나오든 경외심을 갖고 감탄하는 자세로 영화를 보겠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사실 이게 막 엄청 재밌고 흥분되고 신나는 작품은 아니다. 알게 모르게 느슨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라 지루함을 느낄 여지도 있고. 깔끔하고 성실하게 이야기의 조각을 차곡차곡 쌓아올려서 그 가운데 유머도 터지고 갈등도 생기게 하는 타입인지라 대강 보면 그 매력이 훨씬 반감되는 부분도 있고.. 하여간 그렇다. 이야기의 구조를 세세히 뜯어봤을 때 이런저런 의미를 각각의 개별 구조에 실어놓았지만, 꼭 다 흩뜨려보지 않아도 큰 얼개만 잘 따라갈 수 있다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스토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어른과 아이가 함께 볼 수 있는 이야기라는 건 장점이겠고.
프롤로그에 나오는 칼과 엘리의 이야기는 정말로 아련하고 동화적인 느낌을 풀풀 풍기는, 진짜배기 로맨스인데 그 얘길 실사로 찍은 영화에서 본다면 똑같은 정도의 매력을 전달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그러니까 애니메이션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먹히는 이야기라는 건데.. <월-E>때도 그랬고. PIXAR는 매체가 3D가 됐건 2D가 됐건 오랜 세월 쌓여온 동화의 명맥을 잇고 있는 거라는 생각도 든다. "꿈과 희망을 싣고 모험의 세계로"라는 기치를 높이 든 채.
<불신지옥>은 스포일러가 영화 감상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 매우 큰 타입의 영화라 감상을 방해받지 않고 싶으신 분은 제가 앞으로 쓸 이야기를 보지 않으시는 편이 좋습니다. 상관없으신 분들만 '불신지옥에 관한 몇 가지 잡상'을 클릭해서 펼쳐 읽으세요.
공개된 사진을 찾느라 공식 웹사이트에 들어갔다가 메인 페이지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음향과 화면에 덜컥 놀래고 말았다. 안그래도 영화를 보고 나온 이후로 줄곧 등덜미가 서늘한 게 어쩐지 한기가 든 기분이라 이게 2시간 내내 에어컨 바람을 쐰 탓인지 영화 때문인지 애매한 기분이었는데 또 스물스물 오싹해져서 서둘러 포스터 하나를 클릭해서 다운받고 그 사이트를 빠져나온 후 압축을 풀어보니 내가 받아온 건 티저 포스터일세. 그렇다고 다른 포스터를 받자고 다시 그 사이트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ㅠㅠ
여하간 지금부터 쓸 건 그냥 말 그대로 영화에 관한 잡상 몇 가지. 전혀 정리되어 있지 않다.
1. 영화의 주인공 희진(남상미)과 형사 태환(류승룡)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실종된 동생 소진(심은경)을 찾아다닌다. 소진이를 쫓는 동안 주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그 사람들은 희진과 태환에게 여기저기 구멍이 뻥뻥 뚫린, 거짓과 진실이 섞인 이야기를 한 보따리씩 풀어놓으며 죽는다. 그 이야기들을 모두 듣기 전까지-그 사람들이 모두 죽기 전까지- 희진과 태환은 대체 소진과 그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소진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게 이 영화를 끌어나가는 스토리의 큰 기둥이 되는 거고.
2. 그러니까 희진과 태환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고 그 정보는 관객들에게도 제공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희진과 태환의 뒤를 쫓을 수 밖에 없고 그들이 보거나 아는 것 외엔 볼 수도, 알 수도 없다. 어떤 정보도 따로 제공되지 않는다. 거기다 희진과 태환이 지난 상황을 알아가면서 관객에게도 단편적으로 제공되는 정보들 사이에 희진이 보는 환상-꿈까지 뒤섞여 관객들은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지는데, 이 부분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면 <불신지옥>은 또 다른 의미에서(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훨씬 공포스러운 영화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그런 방향을 원치 않았던 것 같고.
3. 희진과 태환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해나가는 과정이 매우 수동적이라는 사실도 제법 중요하다. 영화가 광신적인 분위기(어느 신이건 관계없다)에 한껏 젖어 있고 시종일관 보이지 않는 힘에 끌려다니고 있기 때문에 일관성도 있고.
4. <불신지옥>엔 온몸이 뒤틀린 채 뼈가 따로 노는 긴머리 귀신도 나오지 않고, 작정하고 초현실적으로 사람들을 놀래키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침대 밑을 들여다봐도, 그 속에 손을 넣고 휘저어봐도 날 빤히 응시하는 귀신 얼굴이나 내 손을 잡아채는 무언가의 손 같은 건 없다. 뭐 좀 다른 게 나오긴 하지만. 피 철철 나오는 고어 장면도 없고.. 또 뭐가 없더라.
<불신지옥>에는 그저 광기에 들린 채 아파트 복도를 헤매는 사람들이 좀 나올 뿐이다. 돌아다니다 가끔 창살 사이로 방 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말도 걸어 오지만.. 그게 뭐 대수랴. 아아, 새들도 좀 나온다. 솔직히 난 새의 눈과 주름진 발, 뾰족한 부리가 조금 무섭다.
5.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힘을 이용하려다 두려움에 짓눌려 정신이 나간 채 죽어가는 사람들과 자신이 감당할 수 없었던 불행을 보이지 않는 힘에 기대 피해볼까 하다가 의지마저 놓아버린 사람들. 와중에 희생된 아이. 이미 지고 있는 짐이 무거워 하루하루 버텨내기도 힘들었던 희진은 이미 내가 있는 곳이 지옥인데 어느 지옥엘 더 갈 수 있겠냐고 울부짖는지만 살아내는 일로 머리가 복잡한 희진마저 믿지 않는 자를 기다리는 그 지옥에 두 발을 깊숙히 담그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많이 무섭다. 그리고 영화의 클라이막스 장면, 무릎꿇고 흐느끼는 태환의 모습을 보는 관객들이 그의 무기력감과 공포에 공감하고 함께 굴복하게 되는 순간, 영화 <불신지옥>이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당연히 이후의 씬들은 덤이고.
6. 배우들의 연기는 좋다. 주연 남상미는 괜찮고, (어딘지 김승우를 닮은)류승룡은 훌륭하고. 경비 역을 맡은 분(이창직)도 순간순간 화면을 지배하는 연기를 보여주는데(특히 넋나간 채 혼자 중얼대는 장면과 가위눌린 남상미 위에 걸터앉은 씬, 하물며 복도를 배회하며 창살 사이로 슬쩍 비추는 그림자마저도 에너지가 넘친다) 짧은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범상치 않은 분이다.
아아. 연기 얘길 하면서 <불신지옥>에서 장영남을 빼놓을 순 없다. 엄마(김보연)와 교차되는 캐릭터로써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공포와 광기로 흔들리는 커다란 눈에 하얗게 질린 얼굴빛, 두려움으로 잔뜩 쪼그라들고 한껏 늙은 듯한 몸까지 고스란히 좋은 연기로 표현해냈다. 물론 바로 뒤에 나오는, 생존에 대한 갈망으로 눈이 멀어 욕심이 더덕더덕 붙은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는 연기도 일품이고. 시종일관 차분한 표정으로 타이르고 호소하는 김보연의 연기와도 좋은 대비가 되기 때문에 영화의 그.. 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그 둘의 공헌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7. 대체적으로 제법 잘 만든 공포영화. 취향이야 많이 타겠지만 전반적인 완성도 자체는 괜찮다. 묘한 건 데뷔작 답지 않게 막나가는, 좌충우돌하는 느낌이 없고 뭐든지 적정한 선에서 툭툭 끊어낸 듯한 감이 있다는 거. 영화의 큰 줄기만 놓고 세부적으로 아주 조금씩만 다른 선택을 했어도 완전히 색다른 작품이 나왔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까.
8. 일반적으로 공포영화를 보고 와서 겪게 되는 휴우증들. 눈감으면 뭔가 보이는 것 같다던가.. 뒤돌아보기 무섭다던가.. 화장실에서 세수하다 거울 보기가 무섭다던가. 그런게 하나도 없는데도 여전히 등골이 서늘하다. 확실히 난 귀신 얘기보단 미친 "사람"들 얘기가 훨씬 공포스러워. 웬지 심신이 허약해진 기분이다. 으헝.
달리 특별할 게 없는 영화다. 별 재미가 없다는 거 빼고. 뭐 더 할말이 있나 곰곰 생각도 해보고 하얗게 텅 빈 글쓰기 창을 한참 노려보기도 해봤지만 별 게 없다. 그렇다면야 <궁녀>가 왜 재미 없는지에 대해서라도 써야지.
이 아래로는 줄줄이 스포일러
일단, 영화가 밑밥으로 깔고 시작하는 미스터리의 범인은 귀신이다.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는데 그 뒤엔 킹왕짱 쎈 귀신이 있고, 그 귀신이 만사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을 만들어나가는 데 장애가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왜? 킹왕짱 쎈 귀신이잖아. 가마 안에 탄 의녀가 돌처럼 굳어 죽는 것도, 쥐불이글려 때 처형될 궁녀를 아무도 모르게 바꿔치기 하는 것도, 대비마마 방에 숨어 들어가 그를 죽이는 것도 뭐 하나 거칠 게 없다. 그냥 생각대로 하면 되고~
그런데 이 부분이 먹혀 들어가려면 관객들이 귀신이 야기하는 공포 분위기, 쉽게 말해 원혼의 카리스마에 충분히 장악당한 상황이어야 한다는 점이 전제로 깔린다는 것이 <궁녀>의 최고 문제다. 안타깝게도 이건 뭐, 무섭지가 않다. 시도 때도 없이 화면 주변이 먹물처럼 퍼져나가는 어둠에 잠식되고 막판엔 도대체 어느 영화에서도 빠지는 법이 없는 국산 공포영화의 필살기, 머리카락으로 둘둘 휘어감기 신까지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영화의 서스펜스와 이 혼령의 원한과 목적의 엇박자가 너무 심한 탓에 그 모든 신들이 맹맹하다. 도대체 이 엇박자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가장 큰 원인은 <궁녀>에서 관객들이 느낄 수 있는 대부분의 공포가 궁 안에서 숨죽여 지내는 궁녀들의 조용하고 음울한 광기에서 오는데, 이게 앞서 말한 귀신의 활약과 그에 얽힌 미스터리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입궁하면서 왕과 혼인한 것과 마찬가지인 처지라 연애질도 맘대로 못하고, 뭘 들어도 함부로 말해선 안되고 알아도 몰라야 하는 처지에 위 아래로 고만고만한 처녀애들에 할멈들까지 첩첩이 쌓여있는 수렁에서 빠져나갈 구멍이라곤 상감마마 밖에 없는, 하고 많은 궁녀들이 제각각의 환상에 눌려 조금씩 미쳐가는 것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공포. 이것이 <궁녀>에서 가장 호소력 있게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낼 수 있는 부분이었는데 <궁녀>의 연출진은 이 부분을 제대로 본 줄거리에 맞춰 가져가질 못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볼까. 벙어리 궁녀 옥진(임정은)이 훔쳐낸 금사(이걸 안뺏기려고 바늘로 손톱까지 들어내는데도 버텼다)로 방해가 되는 손톱까지 빼가며 허벅지에 잃어버린 연애편지에 적혀있던 싯구를 수놓는 장면. 이 장면은 <궁녀>에서 관객들을 완전히 사로잡은 몇 안되는 장면 중 하나로 손꼽힐 수 있을 것이다. 꼭 화면에 피가 가득하고 잔혹해서 그런 게 아니라, 얘가 절절하게 맛이 갔구나 하는 점이 굉장히 설득력있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벙어리라고 따돌림 당하는 데다 뭐 하나 변변한 게 없는 애가 내의원 하나가 걸어오는 수작에 인생을 걸고 미쳐가는 걸 보는 게 어떻게 공포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혹은, 중전과 임금의 잠자리를 훔쳐보며 욕망에 몸부리치리던 욕심많은 정렬(전혜진)이 골방에 갇혀 억압된 욕망과 부질없는 환상 사이에서 서서히 정신줄을 놓는 장면을 보자. 정렬의 광기는 쥐불이글려의 클라이막스와 맞물리며 관객의 연민과 공포를 자극한다.
그러나 그게 다다. 영화화의 스토리 중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쥐불이글려 장면에서 수많은 궁녀 중 한 명인 양 섞여 있는, 알 수 없는 얼굴을 (희빈(윤세아)처럼 보이기도 하고 월령(서영희)처럼 보이기도 하는) 카메라가 반복적으로 훑고 지나가도, 주인공 천령(박진희)이 숲속에서 감찰상궁(김성령) 일당에게 쫓기다 머리를 풀어헤친 희빈(월령 귀신이 씌운)을 만나도, 이미 흐름을 놓친 서스펜스는 도저히 다시 살아나질 않는다. 덧붙이자면 서둘러 숲속으로 이동하느라 쥐불이글려 장면에서 얼굴을 가린 채 익명의 가면을 쓰고 모인 궁녀들의 집단 광기를 살려내지 못한 점도 참 아쉽다. 정말 괜찮은 장면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영화의 막바지에 스승님의 조언을 두번씩이나 무시해가면서 꿋꿋이 사건을 파헤치던 천령이 느닷없이 전향하는 것도 스토리가 덜컹대며 굴러가게 만드는 돌부리 중 하나다.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보여주는 천령의 과거와 희빈-월령의 미스터리가 어떤 접점을 가져야 하는데, 중간 중간 끼워넣은 천령의 과거와 천령의 마지막 선택이 전혀 일관성도 없고 논리적으로 설명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천령 이야기가 나온 김에, <궁녀>가 클라이막스에서 노출되는 미스터리의 비밀과 함께 서서히 고조되는 형태의 구조를 가진 영화라고 봤을 때 이야기의 진행과 함께 조금씩 영화의 광기에 젖어 들어갔어야 할 천령의 캐릭터가 별 변화 없이 처음부터 이야기의 절정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천령 역을 맡은 배우 박진희의 연기가 매우 아쉽다. 그 부분이 잘 표현되기만 했어도 결말 부분의 넋 빠진 모습이 힘을 얻고, 스토리의 부족한 개연성을 가려주는 역할을 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
하여간 가능성이 많은 소재였는데 영화의 연출진이 선택한 방향이 많이 아쉬웠던 영화로 기억하게 될 듯 하다. 이렇게 치고 빠지는 미스터리 영화로 갈 거 였다면 지금의 러닝타임(112분)을 좀 더 줄였어도 좋았을 것 같고. 그나저나 <궁녀>를 필두로 올 여름엔 공포영화를 살짝 볼까 하는 계획이 있는데 괜찮은 거 있으면 추천 좀 해주세요. 오래된 영화도 괜찮습니다(구할 방법만 있다면).
중요한 건 아이가 그 지옥에서 무사히 벗어나서 어딘가에 살아있는지, 혹은 달아나다 잡혀 미친놈의 무자비한 도끼질 아래 죽고 말았는지가 아니었다. 사실 영화의 줄거리를 잘 따라가다 보면 누구나 다 그게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되기 마련이다. 그건 그저 크리스틴 콜린스를 움직이게 하는 두 가지 힘 중 하나였을 뿐. 나머지 하나는 알 수 없는 '사실'-아이가 죽었는가 살아있는가-의 진실 여부를 원하는 크리스틴에게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건 그 '사실'이 끼치는 영향력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투쟁이었고. 그러므로 그 투쟁이 어느 정도 종료된 상황에서도 크리스틴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진실을 향해. 너덜너덜한 희망의 동앗줄 하나를 가까스로 붙잡은 채.
다시 돌아와서, 내가 궁금했던 건 캡틴 존스가 정말로 믿은 건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는 정말로 그가 기차역에서 크리스틴과 만나게 해준 아이가 크리스틴의 아이라고 믿었을까. 기차역으로 돌아가보자. 저 멀리 와글와글 모여있는 기자들과, 쇼를 위해 출연 대기중인 경찰청장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막상 아이를 만난 크리스틴은 내 아이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반대로 아이는 엄마라고 말하고. 캡틴 존스는 크리스틴을 설득한다. 뭔가 잘못된 것 같으면 나중에 찾아오라고. 혹시 모르니까 익숙한 환경에서 아이와 지내보고, 다시 확인하고, 그래도 잘못된 것 같으면 찾아오시라. 충분히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크리스틴의 마음이야 어쨌건 간에 어떻게든 사진도 찍고, 감동적인 재회가 만천하에 공개된 이상 캡틴 존스에게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사실이다. 일단 믿으라고 들이댄 사실. 그리고 폭주하는 기관차마냥 일단 달리기 시작한 거, 브레이크 따윈 없는 거다. 진실이 무엇이건 무슨 상관이랴. 이건 사실, 그냥 팩트라니깐. 영화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캡틴 존스는 일종의 희생양 노릇을 충실하게 해내는 와중에 재판에서 진술하면서도 그 아이가 크리스틴의 아이가 아니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없다는 논지를 전개한다. 편견과 아집,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휘둘러온 공권력의 횡포까지 곁들여 견고하게 쌓아올린 논리로 단단히 무장한 채. 재밌는 건 이 지점에서 캡틴 존스의 의견과 크리스틴의 의견이 맞물리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는 거다. 월터 콜린스가 고든의 농장에서 죽었다는 근거가 없다는. 이 영화가 우리나라 아침 드라마라면 이 지점에서 크리스틴과 캡틴 존스가 연합전선을 구성할테지만 이건 다 뻘소리고. 여튼.
체인즐링의 최고조를 장식하는 건 고든이다. 모든 키를 쥐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고든. 그 모든 고통을 이해할 만한 상상력도, 그 모든 고통을 공감할 만한 양심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고든. 그 어떤 진실에도 맞서지 못했던 고든. 심지어 코 앞에 다가온 죽음 앞에서조차. 클린튼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가 상당히 잔인한 게, 고든을 클라이막스에 두고서 마지막에 희망을 이야기하는데, 그야말로 참, 썩은 동앗줄인가 싶어 잡기를 저어하게 만드는 희망인거다. 그래도 그것밖에 남지 않은 사람들은 잡아채지 않을 수가 없을 거고. 크리스틴이 그렇게 희미하게 웃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나도 잘 모르지만"을 올곧게 밀어부치는 영화. 심각한 재난이 발생하고 사람들은 공황에 빠지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절규하지만 해답을 줄 수 있는 이는 어디에도 없고, 원인을 모르니 결과를 예상할 수도 없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상황. 이런 설정의 재난 영화들이 곧잘 다루는 건 그런 상황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의 대응을 통해 인간 내면을 살피거나, 재난의 일면을 상세하게 다뤄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고 상황을 해결하면서 갈등을 해소해주는 내러티브인데 이 영화 해프닝은 그 어느 쪽에도 가깝지 않다. 일단 잘 모르니까 어디든 깊이 들어갈 수가 없는 거지. 그래서 겨우 80분밖에 되지 않는 상영 시간의 반이 흘러가는 동안 줄곧 이렇게 죽고 저렇게 죽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실험을 통해 결론을 도출할 수 있도록" 비교군과 대조군을 보여주고 이에 주인공 엘리엇이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가설을 살짝이나마 검증해내는 순간 영화의 톤이 바뀐다. 아무것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행동을 주저하며 알고자 애쓰는 주인공 일행이 잘 모르는데다가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까지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폭력(무지가 불러오는 폭력)과 마주하고 절망하며, 전혀 알고자 하지 않는, 자기 손에 닿는 세상 외 모든 것을 외면하는 사람(고립의 광기)들을 거쳐가며 '행동'을 결정하는 방향으로. 엘리엇과 알마가 결국 행동하는 건, 주변의 상황이야 뭐가 뭔지 모르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본인들에게 필요한 것, 원하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이다.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진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순간. 여기까지 오면 겨우 그걸 보여주려고 그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거냐 싶은 마음에 혀를 끌끌 차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개인사적 드라마와 사회적 드라마가 교차하는 지점에 굉장한 의미를 담고 거창해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게 잘 되면 자자손손 좋은 영화란 평가를 받기도 하는 거고. 그러니까 해프닝은 범작에 그치긴 했어도.. 짧다는 건 정말이지 대단한 미덕이다. 그렇게 짧은데 그만하면 됐지 뭐.
그러게 왜 억지로 다 보셨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