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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자요, 엄마. (2008)

2008. 10. 17. 23:00 Tags » 나문희, 마샤 노먼, 서주희, 연극, 연극열전, 잘자요 엄마


아무렇지도 않게, 혹은 조금 수선스럽게 어느 집에서나 주말 밤이면 그럴듯하게 주고 받을 듯한 질문과 대답, 타박 등을 주고 받던 와중에 제시는 문득 난 내가 날 죽이려고 해요, 엄마. 라고 털어놓는다. 엄마는 이렇게 답하지. 그래? 참 재밌구나 그래. 눈물이 흘러내린 건 바로 그 순간 부터였다. 맙소사. 거의 하염없이, 연극이 끝날 때까지 쉬지도 않고. 조그만 무대엔 배우 둘 밖에 없고 300여석 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 객석에 음악도 거의 없는 연극이었는데. 코를 훌쩍거릴 때마다 혹여 소리가 너무 큰 건 아닌가 노심초사해가면서. 그래도 어떡해, 그치질 않는걸.

제시가 자살계획을 고백한 후 엄마는 태도를 여러 차례 바꿔가며 생각을 바꿔보려 애쓴다. 달래도 보고 비아냥거리기도 해보고 윽박도 지르고 통하지 않을 걸 알지만 괜한 사기도 쳐보고. 그러면서 엄마의 불안초조한 심리상태는 바로 객석으로 전이되고 오히려 너무 심상하기만 한 제시에게 의문의 마음을 품게 되는 거다. 도대체 왜. 그러나 엄마는 직접 묻지 않는다. 제시와 엄마가 직접적으로 다 꺼내놓고 대화한 적은 없지만 엄마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기 때문에. 어쩌면 이해할 수도 있게 되어 버릴테니 도저히 이야길 꺼낼 수 없는 제시의 인생, 그 바닥 부분의 이야기. 그래서 극 초반 엄마와 제시의 대화는 뜬구름 잡듯 애매하게 그 주제 주변을 맴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는 구체적으로, 직접적으로 변해간다.

인간이라면 지가 목숨 끊는 짓, 그딴 짓은 하는 거 아냐 제시. 그게 할 짓이니? 정신박약, 정신병자나 할 짓이지. 넌 정상이잖니 제시야. 인간은 누구나 다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 있어. 

난 달라요 엄마. 언제나 달랐죠. 난 언제나 그 누구나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어요.


엄마도 알고 있었다. 그저 함께 이야기해보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았을 뿐. 서로에게 궁금했던 것도, 그땐 왜 그랬을까 싶은 것도. 그리고 끝까지 말하지 않고 숨겨놓고 싶은 것도 있었다. 보통의, 평범한, 그저 그런 애정이 그렇듯이. 그러나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자 엄마는 묻는다. 근데 대체 이유가 뭐냐 제시야. 내가 뭘, 어떻게, 잘못했니? 뭐가 잘못됐을까. 내가 얘한테 뭘 잘못했을까. 엄마와 딸 사이의 관계에서 잘못한 걸 떠올리자면, 그러니까, 역사가 너무 길다. 사십년 쯤 되는 시간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안에서 내 딸이 죽을만한 이유를 찾아보면, 결국은 둘 중 하나다. 엄마니까 모를 수 밖에 없거나 엄마니까 알 수 밖에 없는. 제시의 엄마 델마는 아마도 후자였을거다. 그래서 뜬금없이 엄마와 제시 둘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제시를 걱정한답시고 귀찮게 하던 동생 다슨, 제시를 얕잡아보던 올케, 아끼던 반지 두개를 훔쳐서 집을 나간 아들 리키. 그것도 다 아니라고 하니 결국 가장 가까운 둘의 역사를 되짚는다. 제시가 이혼하고 엄마 집에 들어오게 된 것. 지난 크리스마스들. 그런데 제시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 버스 타봤죠. 버스는 사람도 많고 덥고, 덜커덩거리고, 시끄럽고, 오로지 내려버리고 싶은 생각밖에는 안들어도 내릴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직도 더 가야만 자기가 내리는 곳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죠. 근데, 난 내가 원하면 지금 내릴 수 있어요. 왜냐구요? 만일 오십 년을 더 타고 가다가 내려도 내가 내리는 곳은 같은 장소에요. 충분히 탔다고 생각되는 순간, 언제라도 기분이 내키면 난 내릴 수 있어요. 그게 내 종점이에요. 난 충분히 탔어요.

옳아요, 엄만 할 수 없어요. 그리고 나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내 인생을 바꿀 수도, 더 의미 있게도, 그저 이만하면 쓸만하다 느끼게조차 못해요. 아무것도 못해요. 그러나 내가 꺼버릴 순 있어요. 막을 내려 버리는 거에요. 듣고 싶지 않은 게 나올 때 라디오를 끄듯이 말이에요.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에요. 꺼버리는 것. 그건 내맘대로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뒤 무슨 일이 일어날 건가를 난 알 수 있어요. 꺼버리면 멈출 거에요. 그래서 꺼버리려는 거에요. 자, 엄마. 우리 남은 시간이나 잘 보냅시다.

그리고 대화는 흘러간다. 아버지를 한번도 사랑한 적 없었다던 엄마의 이야기, 제시의 손이 차서 제시를 보면 자기가 곧 죽을 것 같아 제시가 있을 땐 집에 찾아오지 않는 아그네스 이야기, 제시의 남편 씨슬이 왜 제시를 떠났는가 하는 이야기들. 다섯 살 때 첫 간질 발작을 일으켰던 제시의 이야기. 그러나 엄마는 제시가 간질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서 숨겨왔더랬다. 심지어 제시에게까지도. 둘의 대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능청스레 늘어놓는 유머와 문득 가슴을 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아픈 진실 사이를 헤매이며 커다란 감정의 진폭을 넘나든다.

지금 간질병 정의내리는 거 아니다 제시. 니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야. 나 때문이야 이 모든 게. 이 모든 지난 일이 없었다면 니가 왜 자살을 한다겠니. 내가 너에게 숨겼던 것, 널 어울리지 않는 남자와 결혼시켰던 거, 또 널 이 집으로 끌어들인 거. 그래서 너한테서 니 생활을 뺏은 거. 이게 다 합쳐진 결과야. 근데 나두 모르겠다. 내가 왜 그랬는지. 그러나 분명히 내가 한짓이라는 건 알아. 이게 다 내 잘못이다 제시. 그런데 이제 이걸 내가 어떻게 수습해야 될지를 난 몰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엄마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구요!

니가 하는 모든 일이 전부 다 나하고 상관 있어! 너는 나야! 니가 세수를 해도 손톱 하날 깎아도 그건 결국 내꺼야. 그래 좋아. 널 죽이는 것처럼 나도 죽여라. 우린 같은 거야. 그것두 같이 하자.

그렇다면, 모든 게 엄마랑 상관 있는 일이라면, 내가 소유한 게 엄마 뿐이고, 그 엄마가 나는 불만이라면, 엄마만 없으면 나머진 다 견뎌낼 수 있는 일이라면, 엄마에게서 영원히 도망칠 수 있는 길이 오직 날 죽이는 일 뿐이라면, 그리고 이게 다 사실이라면 그럼 나 죽어두 되요?

제시, 날 버리지 마라. 안돼.

끊임없이 이어지는 제시와의 대화 중에 엄마는 결국 깨닫고야 만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모른다고 생각해왔던, 안다고 믿고 싶지 않았던 그것을. 왜 제시가 죽으려 하는지, 왜 엄마가 말릴 수 없는지, 어째서 그 둘은 오늘 밤, 하필 제시가 죽겠다고 이야기한 다음에서야 그런 이야기들을 주고 받을 수 있었는지, 어째서, 왜, 제시는 엄마 것이 아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얼마만큼의 시간을 가져야 내 딸을 놓을 수 있을까. 그런 게 가능하긴 한걸까. 제시는 결국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문을 닫는다.

이번 공연은 더블 캐스팅으로 진행되는데, 내가 본 건 엄마/나문희, 제시/서주희 캐스트의 공연이었다. 나문희씨는 우리 눈에 매우 익숙한 드라마 연기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아주 가끔 대사가 좀 씹히긴 했어도 대화의 맥을 따라 감정을 충분히 조절해가면서도 캐릭터의 일관성을 놓치지 않는 부분이 놀라웠다. 분명히 중심을 잘 잡고 있달까. 대사의 톤을 조금만 바꿔줘도 그를 둘러싼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는 느낌. 그리고 그 힘을 잘 조절해서 사용할 줄 안다. 극이 진행될수록 무대를 점차적으로 휘어잡으면서 객석의 감정까지 끌고 가는 능력도 놀랍고. 반면 제시 역의 서주희씨는 살짝 아쉬웠는데, 모든 걸 다 생각해둔 사람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분명 어디선가 감지가 되어야 할 것만 같은데 오히려 엄마보다 더 감정에 휩쓸려서 흔들흔들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라. 그리고 서주희씨의 제시는 웬지 모르게 신경질적이다. 무력하고 지친듯한, 이젠 다 됐다 싶은 인생의 피로감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아서. 기회가 된다면 황정민씨의 제시도 보고 싶은데(엄마는 역시 나문희씨로) 이거 원, 또 봐도 그렇게 울까 싶어서 겁이 덜컥 난다. 아마도 울겠지. 으휴. 특히 방에서 총소리가 울린 후 나문희씨의 연기는 아직도 가슴이 먹먹한 게,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니까. 커튼콜 할 때 보니 나문희씨는 그때까지도 울고 있더라. 가슴을 부여잡고.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80분이 그렇게 괴로운데, 연기하는 사람 입장에선 오죽할까.

내가 볼 때도 그랬고, 나문희씨 캐스트가 예정된 날짜는 10월 말까지 거의 매진이었는데 오늘 글을 쓰려다가 찾아보니 워낙 인기가 좋고 평가도 좋아 연장이 확정됐다. 2009년 1월까지 할 예정인 모양인데, 11월 중순부터는 나문희씨가 빠지고 예수정씨가 대신 들어가는 듯. 기회가 된다면 그 전에 한 번 더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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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2009.09.05 09:4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글씨가 전혀 안보여 가슴이 아려옵니다..

    • BlogIcon Munity 2009.09.08 01:34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강제로 글씨 색을 검정으로 설정해두고 쓴 글이라(바탕이 흰색일 때) 여전히 검정으로 남아 있네요. 나중에 수동으로 하나씩 다 바꿔야 되겠어요.

[영화] 타인의 삶

2008. 4. 28. 05:20 Tags » 연극, 영화, 음악, 진실,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 타인의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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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드라이만은 더 이상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 그는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 없는 감옥에 감금되지도 않았고 어떤 제재도 받지 않았지만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이야기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 드라이만을 핍박하고 싶어 안달하던 전 문화부 장관은 그 이유를 반항할 것도, 혁명으로 무엇을 바꿀 필요도 없는 완벽한 체제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꼭 그렇지는 않았다. 좋은 일 보다 나쁜 일이 사람을 좀 더 자극하는 것은 맞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건 꼭 그런 식의 자극만은 아니니까. 어떤 사람은 상실감에서 움직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갈구하는 애정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그리고 비즐러를 움직인 건 진실이었다. 진실로 완벽하게 '실재'로 존재하는 2인 국가에 대한 동경(*태초의 밤-커트 보네거트).

드라이만과 질란드가 삶을 꾸려나가던 작은 공간은 처음엔 그 둘만으로도 완벽했으나 비즐러가 그들을 지켜보기 시작하면서 그 무대는  더 이상 둘만으로는 완벽하지 않다. 일단 끼어든 이상 뭐든 역할을 해야 하므로 결국 비즐러는 관객과 연출자의 자리를 넘나들기 시작한다. 드라이만과 질란드와의 인터랙션이 깊어질수록 비즐러 개인의 삶의 파고 역시 높아진다. 그는 창녀에게 머물러달라 부탁하고, 그의 정체성을 묻는 아이에게 공의 이름이 무엇이냐 묻는다.

그래서 비즐러가 왜 갑자기 변했느냐는 질문은 이치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저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보일 때, 그 빛을 향해 나아가지 않을 수 있다면, 그래, 그 질문은 옳다. 하지만 누구든 그렇지 않겠는가.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즐러가 바라보는 드라이만과 질란드의 삶은 진실이었으니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방법을 가르치던 비즐러가 불나방처럼 그 진실을 향해 뛰어드는 게 이상할 리가 없다. 실제로 비즐러가 찾던 건 진실이지 체제를 위한 변명은 아니었으니까.

드라이만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깨닫는다. 비극으로 끝난 줄 알았던 그 무대에 함께 올라 있던 다른 배우의 존재를. 그리고 아직도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남아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생이 지속되는 한 아직은 어떤 이야기도 끝나지 않았고 그들이 공유했던 진실은 여전히 빛바래지 않은 채 조용히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었으므로. 아아, 그래서 파블로 네루다도 노래했던 거다. We shall go on living-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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